아티스트 해설

조안 바에즈(Joan Baez)

방살미 2018. 6. 22. 09:00
*프로필*
-조안 바에즈(Joan Baez)-
 
 
포크는 메시지를 담은 지적 저항의 음악으로서, 또 소박한 사운드로 따스함을 만들어 내는 서정적인 음악으로서 장르의 가치를 지닌다. 밥 딜런(Bob Dylan)과 더불어 1960년대 포크의 중심에 서 있는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40여 년 음악 생활을 반전과 인간 평등에 바친 저항적 지성인으로서, 또 아름다운 목소리를 대표하는 서정적 보컬의 소유자로서 이러한 포크의 장르적 가치를 모두 대변하고 있다. 어느 문화인 보다 공격적인 자세로 거친 세상에 맞서는 동시에 따스한 목소리로 대중의 가슴을 달랜 조안 바에즈는 포크의 전설로서 손색이 없다.
 
1941년 1월 19일 뉴욕의 스태튼 아일랜드(Staten Island)에서 태어난 조안 바에즈(Full-name: Joan Chandos Baez)는 핵물리학자이면서 무기 개발에 끝까지 반대한 의식 있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인권을 최우선에 두는 의식 있는 젊은이로 성장해 나갔다. 아버지를 따라 뉴욕에서 이라크의 바그다드, 다시 미국의 캘리포니아를 거쳐 메사추세스(Massachusetts)에 정착하기까지 겪은 다양한 경험은 그녀가 세상을 다른 시각에서 보고 다른 태도로 풀어 나가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아버지로부터 전쟁이라는 것이 인류에게 끼치는 죄악을 배웠으며, 멕시코인 아버지를 둔 덕에 백인과 다른 인종으로서의 부당한 대접을 경험 했다. 이라크에서 생활하면서 문화적 이방인의 삶을 경험했으며, 캘리포니아의 비트, 히피 젊은이들을 겪으며 인류애와 평화에 대한 인식을 키우고, 마틴 루터 킹과 간디의 사상을 익혔다. 어린 시절 경험들이 그녀의 사상적 배경을 마련해 주었다면, 마지막으로 정착한 메사추세스는 그녀에게 음악적 길을 열어준 곳이었다. 15살에 이미 기타를 잡고 학교 합창단에서 노래한 경력이 있지만 그녀가 포크 음악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게 된 것은 당시 포크의 전설적 인물들이 자리했던 캠브릿지(Cambridge), 보스톤(Boston)이라는 지역적 환경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보스턴 대학에 진학, 연극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포크 음악에 경도된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포크 음악이 연주되는 커피하우스에서 보내고 있었다.
 
합창단 생활을 하며 보컬을 다졌고, 기타 연주도 할 수 있었던 그녀는 가슴 속에 끓고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포크 음악에 싣기로 결심하고 1959년 캠브릿지에 위치한 포크 클럽(Club 47)을 통해 가수로 데뷔한다. 그 해 조안은 클럽에서 만난 빌 우드(Bill Wood), 테드 알레비조스(Ted Alevizos)와 함께 보스턴의 지역 레이블을 통해 자신의 첫 레코딩인 [Folksingers 'Round Harvard Square]를 선보이기도 했다.
 
역대 포크 싱어 중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로 대접 받고 있는 만큼 그녀의 매력은 금새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곧 시카고의 큰 클럽으로 옮겨 노래하던 그녀는 2주만에 밥 깁슨(Bob Gibson)이라는 포크 싱어의 눈에 뛰었고, 그의 권유로 포크계의 등용문 뉴포트(Newport) 포크 페스티벌에 함께 참여, 새로운 포크 스타로 떠올랐다. 이듬 해 정식 솔로 뮤지션의 자격으로 다시 한 번 뉴포트 무대에 오른 그녀는 곧 포크 전문 레이블인 뱅가드(Vanguard)와 계약을 체결하고, 12곡의 트래티셔널 커버 곡을 채운 데뷔 앨범 [Joan Baez]를 발표했다. 앨범의 성공은 물론, ‘타임’지의 커버를 장식하는 등 내면을 파고드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포크 씬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지만 조안 바에즈는 상업성을 철저히 거부하고 포크를 대하는 초심을 견지, 이후 71년까지 뱅가드를 통해 꾸준히 앨범을 발표하며 저항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대학가 위주의 공연 활동을 꾸준히 펼치면서 앨범 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던 그녀는 1961년 [Joan Baez, Vol. 2], 1963년 콘서트 앨범인 3, 4집 [Joan Baez in Concert, Pt. 1], [Joan Baez in Concert, Pt. 2], 1964년 완전한 통기타 어쿠스틱으로 만들어 진 마지막 앨범 [Joan Baez 5]등을 꾸준히 히트시키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국내에도 그녀의 이름을 전한 ‘Donna Donna’, ‘Mary Hamilton’, 60년대 프로테스트 정신의 핵심으로 대접 받는 ‘We Shall Overcome’ 등이 모두 이 시기에 발표된 노래들이다.
 
1965년 밥 딜런을 중심으로 불어탁친 포크록의 광풍은 포크 정신을 고수했던 조안 바에즈의 사운드에도 역시 영향을 끼쳤다. 국내에 그녀의 대표곡으로 알려 진 발라드 곡 ‘The River in the Pines’(1965), 1966년 서정성을 살린 크리스마스 앨범으로 앨범 차트 6위의 큰 성공을 거둔 [Noel], 영, 미권의 명시(詩)들을 읊조린 [Baptism](1968) 등 포크 록 성향과 동떨어진 음악을 연이어 보여주기도 하였지만 1965년 작 [Farewell, Angelina], 1967년 작 [Joan] 등에서 그녀는 존 레넌, 도노반, 폴 사이먼 등과 조우하며 음악의 폭을 넓히기 시작했고, 사운드에 있어서도 기타 하나에만 의존한 단순한 사운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1961년 밥 딜런을 만나 그를 키우고, 음악적 동반자에서 연인으로까지 발전했던 그녀는 1965년 밥 딜런과 이성 관계에서의 이별을 고했다. 자신 음악의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지만 저항 정신과 실천의 문제에 있어서 실망감을 갖게 되었거나, 애초에 음악적 동반자의 감정이 애정으로 발전했고, 결국 음악적 방향이 달라지면서 더 이상 이들이 함께할 이유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사적인 감정에서 이별을 고한 이들이지만 음악적인 부분에서는 여전히 동반자의 관계를 지속해 나갔다. 이미 딜런의 대표적인 반전 노래 ‘A Hard Rain’s A-Gonna Fall’이나 그의 곡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Farewell, Angelina’ 등으로 잘 알려진 그녀였고, 이별 후인 1968년 딜런의 곡들을 두 장의 앨범에 담은 [Any Day Now]를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70년대 이후에도 ‘Forever Young’ 등 딜런의 곡을 버리지 않았으며, 함께 순회 공연을 펼치는 등 영원한 음악적 동반자로 남아 있다.
 
밥 딜런과의 관계가 정리 된 후 조안 바에즈는 좀더 실천적인 저항 운동가 데이빗 해리스(David Harris)와 사랑에 빠졌고, 인권을 위해 현장을 함께 뛰던 두 사람은 1968년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곧 두 사람은 이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평화주의 행동 운동가였던 데이빗 해리스는 사람을 죽여야 하는 징병을 거부했고, 결국 3년의 실형을 살아야 했다. 평화 운동의 지도자 다운 실천적 삶이었으며, 아내인 조안 바에즈는 그를 위한 노래를 담아 감옥에 있는 남편에게 [David’s Album]을 선물했다. 데이빗 해리스는 사상적, 실천적인 측면 이외에도 조안 바에즈의 음악에 큰 영향을 끼친다. 컨츄리 음악의 팬이었던 남편에게 선사하는 앨범인 만큼 이 앨범부터 그녀의 음악에는 컨츄리 성향이 가미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그녀의 음악은 정통 포크의 단순함을 벗고, 본의 아니게 대중성을 견지하게 되었다. 안 보면 마음이 멀어지기 때문인지, 이처럼 돈독한 모습을 보이던 이들이었지만 1971년 서로 떨어져 살게 되고 결국 이혼하고 만다.
 
1969년 우드스탁에 등장하는 등 젊은 포크의 기수로서 여전히 맹 활약하고 있던 그녀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단순한 가수가 아닌 싱어송라이터로서 차츰 변모하기 시작한다. 트래디셔널 송에서 시작하여, 밥 딜런을 비롯 다른 사람이 만들어 준 노래를 부르며 포크 싱어로서 한계를 지적 당해 온 그녀이기에 송라이터로의 발전은 중요한 변화였다. 밥 딜런 음악의 또 다른 출구로 인식되어 온 그녀가 조안 바에즈라는 독자적인 뮤지션으로 서게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거침 없는 저항을 펼쳐 온 공격적 실천자 였던 그녀였지만 음악은 서서히 팝의 테두리로 들어오고 있었다. 상업적인 음악은 아니었지만 딜런의 포크록 계승자 더 밴드(The Band)의 대표 곡 ‘The Night They Drove Old Dixie Down’으로 첫 차트 탑10을 기록한 데서 알 수 있듯, 일렉트릭 기타를 비롯 제도적 대중 음악의 여러 요소들이 수용되었고, 대표 앨범인 1975년 작 [Diamond & Rust]에 이르러서 그녀의 저항적 태도 역시 약화되어 있었다. 철저한 행동주의자였던 데이빗 해리스와의 결별, 그 속에서 드러났을 수도 있는 공격적 참여에 대한 실망감 등이 그녀의 음악에 영향을 끼쳤다는 추측도 가능할 듯 하다. 여하튼, [Diamond & Rust]의 경우 올뮤직 가이드로부터 별 다섯 개를 얻고 있는 수작으로 꼽히고 있는 만큼 보컬, 사상, 실천성 뿐 아닌 음악적 부분에 있어서도 조안 바에즈는 정상의 가치를 만들어 내었다.
 
1980년대 이후 조안 바에즈는 씬을 대표하는 가수로서의 전성기를 마감한 듯 보이지만 1997년에 이르기까지 29번째 앨범 [Gone from Danger]를 발표하는 등 큰 공백 없이 지속적으로 활동해 나가고 있으며, 인류를 위해 몸을 던졌던 초심을 잃지 않고 각종 인권 행사와 사회 운동 공연 등에 꾸준히 참여해 왔다.
 
 
음악적으로도 많은 얘기를 풀었지만 그녀의 또 다른 진가, 즉 실천하는 지성으로서의 조안 바에즈 또한 놓쳐서는 안 될 정보들이다. 노래 가사를 통해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했던 밥 딜런과 달리 조안 바에즈는 여성임에도 불구, 직접 세상과 깡으로 몸으로 부딪혔다. 베트남 전 반대 시위와 흑인 차별에 반대하는 인권 시위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참여하였고, 너무도 강하게 최선을 다 했음은 물론, 1964년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국방비로 들어가는 자신의 세금 60%를 거부하기도 하여 반전의 기치를 전했고, 사형 선고자들의 감형을 위해 시위한 경력도 가지고 있다. 60년대 중반 이후 징병 거부 운동에 적극 동참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운동 지도자인 데이빗 해리스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극렬한 반전시위에서 몸으로 뛰었던 그녀는 1967년 캘리포니아에서 시위 도중 체포되어 구속 되는 등 수 차례에 걸쳐 감옥 신세를 진 것으로 얄려져 있다.
 
세계적 뮤지션 중 가장 거센 인권 운동을 펼쳤던 실천하는 뮤지션 조안 바에즈는 그 공로를 인정 받아 이후 아틀란타 시의 8월 2일이 ‘조안 바에즈의 날’로 지정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으며, 1979년에는 직접 국제 인권 기구인 ‘Humanitas International’을 창설, 나이가 들어도 식지 않는 인간애를 보여주었다. 베트남, 라틴 아메리카 등 인권 사각의 국가에서 직접 사정을 펼치며 목숨의 위협까지 감수해 내었다는 그녀의 열정은 한 명의 뮤지션으로서 그녀를 저울질 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즈음, 조안 바에즈와 같은 인류를 사랑하는 문화인이 간절히 그립다.







조안 바에즈 - 도나 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