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rah Vaughan
Born Mar 27, 1924 in Newark, NJ
Died Apr 3, 1990 in Los Angeles, CA
1924년 3월 27일 미국 뉴저지주 뉴워크에서 태어난 사라 본의 본명은 사라 로이스 본(Sarah Lois Vaughan)으로 그녀의 어머니는 세탁소에서 일했으며 아버지는 목수였다.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음악을 좋아하는 부모의 영향으로 7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며,12세가 되던 해에는 고향의 몬트 지온 밥티스트 교회(Mount Zion Baptist Church)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음악학교에 진학하여 피아노 정규음악수업을 받았다. 또한 1931년부터 39년까지 피아노 레슨을 통해 뛰어난 연주가로서의 재능을 키워 나갔으며 12살이 되는 해에는 합창단의 올갠 연주를 맡기도 하였다. 18살 때 그녀는 할렘의 전설적인 아폴로 극장의 아마추어 콘테스트에 참가하여 "Body and Soul"을 불러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였고 새로운 디바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콘테스트에서 가수 Billy Eckstine의 눈에 띄어 1943년 4월에 그의 추천으로 그가 속해있었던 "Earl Hines 악단"의 세컨드 피아니스트겸 보컬이 되어 1943년에서 1944년까지 이 곳에서 활동하였다. 그 당시 그녀는 18세였다. 바로 선배 엘라 핏제랄드(Ella Fitzgerald)가 발굴하게되어 성공의 시발점이 되었다.
1943년 여름 얼 하인즈 악단이 해산되고 솔로 가수로서의 꿈을키우던 빌리 엑스 타인은 1944년 6월 배드 존슨의 협력을 얻어 진보적 맴버들로 구성된 밥 지향적인 자신의 악단을 결성하였는데, 그 맴버들을 보면 '찰리 파커''디지 길레스피' '아트 블레키'등의 굵직한 뮤지션들과 '사라 본'이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얼 하인즈 빅밴드의 남성 보컬리스트이자 사라 본의 멋진 보컬 파트너였던 빌리 엑스타인은 화려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빅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사라 본 역시 여기에 가입하는데 그녀의 레코딩 데뷔가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익히 알려진 대로 당시 빌레 엑스타인의 빅밴드에는 비밥의 창시자인 찰리 파커(Charlie Parker),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사라 본은 이들의 영향을 받아 비밥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는 나중에 악기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이용하는 계기가 된다.
새시(Sassy: 사라 본의 별명)는 1945년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 등이 빅밴드 맴버로 참여한 솔로 데뷰앨범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게 된다. 또한, 1946년에는 디지 길레스피의 SHAW' NUFF (Musicraft) 2/45 -11/46 에서 "Lover Man"을 부르게 되면서 상당한 시일동안 찰리 파커 등과 일하기도 했다.
1945-1946년 겨울 잠시 "John Kirby 악단"에 소속시 트럼페터 George Treadwell 을 만나 47년에 결혼을 한다. 그리고 남편인 죠지 트레드웰이 매니져로 나서서 그녀의 겉모습을 세련되게 변화를 주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특히 1947년에는 트럼펫터인 조지 트레드웰(George Treadwell)과 결혼을 하는데 그는 이후 그녀의 매니저로 레퍼토리 결정, 음반 레코딩 그리고 공연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자리매김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된다.
사실 그녀는 솔로 데뷔 이전부터 디지 길레스피의 'A Night In Tunisia'를 보컬 버전으로 부른 'Interlude'로 커다란 주목을 받아왔다. 하지만 솔로로 데뷔한 후 발표한 1946년에서 1948년까지의 앨범들을 통해 보다 성숙한 음악을 들려주었으며 기존의 작품들을 밥 스타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1949년 콜롬비아 레코드와 계약한 후부터 사라 본은 본격적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다. 물론 당시 음반들은 상업적인 면이 강한 작품들로 오케스트라가 참여한 듣기 편한 노래가 많았지만 1950년 5월 18일, 19일 양일에 걸쳐 녹음된 지미 존스 밴드(마일즈 데이비스가 참여)와의 협연한 작품들은 콜롬비아 시절 최고의 작품이자 가장 재즈적인 곡들로 [Columbia Years (1949-1953)] 앨범에서 만날 수 있다.
1940년대말 사라는 히트싱글을 다수 발표하게 되었으며 성인층의 사랑을 받게 된다. 재즈뮤지션들도 그녀와의 공연을 즐거워 했으며 저명한 재즈음악작가 Gunther Schuller는 그녀를 금세기 최고의 보컬리스트 겸 창작력을 가진 보컬리스트로 극찬하였다
사라본은 40년대의 자신의 보이스를 가사전달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싱어라기 보다는 그것을 재즈 악기로서 사용하면서 최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후 그녀는 머큐리(Mercury) 레이블과 5년간의 계약을 맺는데 음성으로 가사를 표현한다는 보다는 악기처럼 활용하는 그녀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더욱 발전하게 계기가 된다. 사실 머큐리 시절 역시 오케스트라가 참여한 이지리스닝 계열의 음반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머큐리 산하의 엠아시(EmArcy) 레이블을 통해서는 그녀가 사랑하는 재즈 음반을 발표하는데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캐논볼 애덜리(Cannonball Adderley) 등이 참여하였다.
당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1954년 발표된 [Sarah Vaughan With Clifford Brown]으로 오늘날까지도 사라 본의 대표작으로 인정받고 있는 작품이자 국내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녀의 앨범이기도 하다.
머큐리를 거쳐 사라 본은 룰렛 레이블(1960-64년), 그리고 다시 머큐리로 복귀한다. 하지만 60년대말 그녀는 4년간의 공백을 갖기도 하였다. 사라는 천부적으로 뛰어난 목소리를 지닌 재즈 보컬리스트로 4옥타브를 오르 내리는 보컬기교는 가히 60년에 재즈보컬계의 신화로 추앙된다. 사라는 매번 다른 스타일의 음색으로 노래했으며 그 기교와 애드립은 타의 추종을 불허 했다. 가성으로 노래할 때도 힘들이지 않고 한음절 사이사이마다 최고 음역에서 최저음역으로의 자유로운 구사를 했으며 이는 브라스 악기의 아름다움과 비교할만한 것이었다. 사라야 말로 전형적인 만능재즈뮤지션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1971년 메인스트림(Mainstream) 레이블을 통해서 컴백하였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50, 60년대에 비해 다소 짙어졌지만 유연성이나 풍부한 성량 게다가 엘라를 연성시키는 화려한 스캣까지 그녀의 가창력은 여전하였다.
1977년 그녀는 노먼 그랜츠의 파블로 레이블과 계약하는데 이듬해 오스카 피터슨(Oscar Peterson), 조 패스(Joe Pass), 레이 브라운(Ray Brown), 루이 벨슨으로 구성된 쿼텟과 함께 그녀의 또 다른 걸작 [How Long Has This Been Going on ?]을 발표한다.
80년대 사라 본은 카네기 홀 그리고 TV를 통해 대중들과 만났다. 또한 1987년에는 세르지오 멘데스(Sergio Mendes)의 제작 아래 밀톤 나시멘투(Milton Nascimento)와 함께 라틴 앨범 [Brazilian Romance]을 발표하는가 하면 생애 마지막으로 등장한 TV에서는 디지 길레스피, 허비 행콕(Herbie Hancock) 등과 함께 'Sass And Brass'란 프로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1990년 4월 3일, 향년 66세로 그녀는 우리 곁을 떠났다.
그녀의 사망 원인은 폐암이었다.
Mi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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