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해설

한국 록의 거장 신중현과의 첫 대면 |

방살미 2018. 6. 21. 11:36
한국 록의 거장 신중현과의 첫 대면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웹진 '가슴' 2002.10.04 )
장소: 서울 문정동 [우드스탁]
날짜: 2002년 8월 13일 오후 4시 - 5시 30분
질문자: 신현준, 이용우
참석자: 최지선, 송창훈
더위가 한풀 꺾여가던 지난 8월 중순, 송파구 문정동으로 신중현을 만나러 갔다. [weiv]를 드나드는 층과 비슷한 연령대의 젊은(어린?) 층들, 그러니까 현재 음악 수용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층들에게 신중현은 '이름 정도는 들어 본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음악을 실제로 접한 이들이 얼마나 될 지는 모르겠다. . 혹 들어봤다면 1990년대에 신효범, 봄여름가을겨울, 윤도현, 조관우 등이 그의 노래를 다시 부른 것일 가능성이 높다. 개중에는 1997년 경 그에 대한 헌정음반과 헌정공연을 경험하면서 그가 '한국 록의 대부'로 옹립되었던 분위기를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어느덧 60대 중반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점이 신중현을 인터뷰하러 간 이유 중 하나였다. 직접적인 동기는 올해에도 그와 관련된 음반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올 봄에 지구레코드사에서 나온 '신중현 지구레코드 전집' 형태의 박스세트 [Not For Rock: 大韓民國樂音樂人]은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나온 것이니 제외하더라도, 올 여름부터 나오기 시작한 '신중현 작품집'(옛 LP들을 CD로 복각한 음반들)은 그가 직접 관여하고 작업한 것이다. 그는 신중현 M&C(Music & Creation)라는 회사를 설립해 이정화(덩키스)의 데뷔(이자 유일작) 앨범(1969)과 김정미의 [바람](1973)을 필두로 복각 작품들을 차례로 발매하고 있다.
인터뷰를 하게 된 다른 동기는 한국 록의 잊혀진 황금기였던 1960-70년대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한국 대중음악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는커녕 기초 자료조차 구하기 힘든 상황에서, 관련자들과의 인터뷰 없이는 1960-70년대 그룹 사운드의 음악과 활동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시절 최고의 작곡가이자 기타 연주자, 때로는 '가수'였던 신중현을 인터뷰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우드스탁]에 찾아갔을 때, 그는 여러 후배 뮤지션들과 함께 음반 녹음을 위한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복각 CD 작업 외에, 자신의 히트곡들을 다시 녹음하여 음반으로 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이 음반은 최근 [Body & Feel]이란 이름의 두 장짜리 CD로 발매되었다). 원래 공연장이었던 [우드스탁]은 스튜디오로 바뀌어 있었는데, 플로어에는 각종 장비와 악기들이 놓여 있었다. 
                 
                  ▲ 이정화의 복각음반
신중현 레코드(1): 복각, 재발매, 재녹음
Q:  최근 이정화와 김정미의 음반이 복각되어 재발매된 것 축하드립니다. 재발매한 특별한 동기 같은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 제가 초창기 때부터 음반이 굉장히 많아요. 근데 요새 세대들이 잘 모르죠. 근데 그 음반들이 전부 금지되고 사장되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좀 아까워요. 아까운 건 좀 개인적인 거니까(중요한 건 아니지만), 옛날 사운드를 요새 사람도 좀 알았으면 좋겠다. 왜냐면 그때 당시 1960년대, 1970년대 음반들은 사실 모노 사운드지만 인간적이었습니다. 그런 음악(성)들이 남아서 존재하고 있다면 한국의 문화 역사에 좀 도움도 되고, 앞으로 세대들한테도 뭔가 문화 유산 이런 거로 좀(기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음악성을 조금이나마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
Q:  이때까지는 재발매할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나요? 판권 문제 같은 게 좀 걸려 있다는 말도 들었는데요
- 일단 (시장이) 죽어 있었고, (그나마 그 음반들이) 롱 플레이(LP) 시절(의 음반)이어서 다 없어졌지요. 근데 너무 오래된 상태니까 옆에서 자꾸 (재발매)하라고 그래서... 사실은 다 잊어버리려고 그랬었는데....판권 문제는 그때 당시 녹음을 해서 판이 나왔지만 나한테 뭐 돈 준 적도 별로 없고, 로열티를 준 적도 없어요. 내가 작사 작곡을 했고, 연주했고, 노래를 했는데 판권을 가진 분들이 그동안 나한테 뭐 해준 게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Q:  판권 문제와 관련해서는 킹 레코드의 '킹박'(박성배 사장)에 관한 이야기를 여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분과 계속 관계를 맺고 음반을 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음반을 취입하고 받으신 게 거의 없다는 말씀인가요? 양희은씨의 자서전에 보면 그 분은 음악인에게 돈을 준 적이 거의 없고 자기도 한두 번을 제외하고는 받은 게 없다고 하던데...
- 저도 돈 받으러 청계천(필자주: 킹 레코드사는 당시 청계천에 있었다)에 몇 번 갔었지만 못 받았어요. 하지만 그때 시절이 뭐 그렇게 인간적으로 돈 안주면 안 한다, 뭐 이런 시기는 아니었어요. 사람을 믿고 살았던 때니까.
Q:  킹박 선생님은 돈은 별로 주지 않았지만 음반에 대한 수완 같은 건 좋으셨다고 하던데요.
- 그건 사실이죠.
Q:  그렇다면 현재 마스터테이프는 그분이 가지고 계신 건가요?
- 그 사람이 다 가지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있는 게 별로 없을 거예요. 그 당시엔 (마스터)테이프 값이 비싸다 보니까 그 위에다 자꾸 녹음했어요. 한번 레코드 마스터를 딱 땄다 하면 테이프는 지워버려요. 거기다 다른 녹음을 재탕을 하는 거지. 그러니까 마스터테이프는 없고, 뭐 판에 찍어내는 원본, 그러니까 마스터 디스크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테이프는 없을 거예요. 그때는 원판을 눌러서 찍는 식이었는데, (LP가 나오지 않은 지도  오래 되었으니) 그거 지금은 다 없어졌을 거예요. 그게 뭐 남아 있겠어요?(필자 주: 당시에는 마스터테이프를 재활용하는 게 관행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자본이 많은 방송국의 사정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방송 프로그램을 녹화한 원본 테이프를 지우고 다시 다른 프로그램을 녹화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Q:  유니버어살 레코드와 킹 레코드는 어떤 관계였나요? 마장동 스튜디오가 유니버어살 스튜디오로 알고 있는데 이 스튜디오와 음반사와의 관계도 복잡해 보입니다
- 유니버어살은 그때 당시 생긴 음반사구요. 킹 레코드는 킹박 개인이 하던, 허가도 안난 곳이예요(필자 주: 1968년 음반법이 시행되어, 음반사로 정식 등록하려면 시설 요건을 갖춰야 했는데 정식 등록을 한 곳은 지구, 신세기 등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이전부터 음반을 기획 제작하던 영세 레코드사들은 등록된 음반사의 이름을 빌려 발매하는 방식으로 생존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스튜디오는 스튜디오죠, 녹음실 말입니다. 초창기는 킹박의 회사가 거기 같이 있었어요. 스튜디오와 같은 건물 안에 있었죠. 그런데 자꾸 이름이 바뀌는 건 나도 이상해요.
Q:  그런데 이정화(덩키스)의 음반은 '신향 레코드'나 '대지 레코드'같은 레이블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건 킹 레코드와 어떤 관계인가요?
- 아마도 그때는 레코드사들이 세금을 물지 않으려고 이름들(주: 레이블을 말한다)이 자꾸 바뀌고 없어지기도 한 것 같아요... 신향이나 대지는 당시에(있다가) 다 없어져버렸던 것들이에요.
Q:  노재명님이 쓰신 책을 보니 '킹 레코드사는 유니버설 녹음실을 개방해놓고 신중현이 언제든지 녹음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었다. 아무 거나 좋으니 녹음해라. 왜냐하면 나오면은 그 앨범은 히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사실인가요?
- 나오면 히트했다는 말은 좀 과장이지만, 내가 필요로 할 때는 언제든지 즉시 개방을 해주는 건 있었어요. 딴 스케줄이 있어도 우선권을 줬고.
'신중현 작품집' 복각 CD 시리즈 1편으로 나온 이정화(덩키스)의 음반. LP 커버의 축소판으로 만들어져 LP의 느낌을 잘 살렸다.
Q:  이번에 재발매 작업하는데, 상태가 양호한 LP가 없어서 고충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앞으로 재발매를 위해 필요한 음반들은 어떤 것들인지요? 일본에서는 LP 복각해서 재발매할 때, 여러 장의 LP를 갖다 놓고 상태 좋은 부분만 골라서 편집한다고 들었거든요.
- 그거 지금 여기저기 얘길 하고 있는데, 좋은 상태의 LP를 구하기가 힘듭니다. 가지고 있는 사람도 빌려준다고 말은 그러는데 빌려주지 않는 경우가 많구요. 일본처럼 복각하는 게 좋은데... 필요한 건 내가 초창기에 냈던 것들을 전부죠. 애드 훠, 펄 씨스터즈, 김추자... 나도 음반들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상태가 더 좋은 걸 구하려는 것이죠. 
Q:  실례겠지만 재발매 CD의 판매는 어떠신지요?
- 음반 발매한 쪽에서 그런 소리는 하지 않네요. 뭐.. '잘 팔린다'고 그러면 돈 달라고 그럴 것 같으니까 그 소리를 안하는 건지...(웃음)
Q:  어떤 사람들이 이 음반들을 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나요? 옛날 이 음반을 들었던 분들인가요?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음반을 잘 사지 않는 것 같아서 드려보는 질문입니다.
- 그렇죠, 뭐. 옛날 분들이 들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옛날 분이래 봐야 사실 음악하곤 거리가 멀어진 상태고... 그냥 이런 게 있다는 것만 알리는 거죠. 꼭 사라는 것도 아니고.
Q:  제가 전에 독일에서 나온 [Love, Peace and Poetry: Asian Psychedelic Music]이라는 편집음반을 보니 더 맨 시절에 녹음된 "아름다운 강산"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그리고 저작권료 문제 같은 것은 어떻게 된 것인지요?
- 네. "아름다운 강산"이 독일 해적판이 나와있다고, 자꾸 얘길 하는데 나는 본 적이 없네요. 근데 그거 저작권 침해인데, 그걸 낸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야 달라고 그러죠.
Q:  재발매된 김정미의 CD는 원판 LP에 비해 주행속도가 느린 것 같습니다. 직접 작업을 하신 사람으로서 견해는 어떠신가요?
- 그때는 롱 플레이(LP)이고 뭐고 제 속도가 하나도 없어요. LP는 플레이어(턴테이블)에 따라서 빠르고 느리기 때문에... 똑같은 33(33과 1/3 LP를 일컬음) 회전수도 각각 달라요. 그건 그렇게 문제는 되지 않아요. CD 경우에는 디지털이기 때문에 정확하죠. LP는 재판 틀리고 원판 틀리고 그래요. 뭐, 느리면 빨리 틀면 되죠.(좌중 폭소)
신중현 레코드(2): '히키 신'부터 '엽전들'까지
신중현의 첫 레코딩인 연주 음반 [히키-申 키타-멜로듸(경음악 편곡집)](1959). 민요, 동요 등을 재즈 풍으로 연주했다.
Q:  미8군 무대 시절에는 재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자료에 많이 나오는데 정작 1958년에 나온 음반은 '히키 申'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당시 어떤 이름을 사용하신 게 맞는 건지요?
- 네. 그땐 이름이 많았어요. 그때가 미8군 무대에서 연주하던 때라서... 1958년도거든요. 미8군에서 연주할 때는 오디션 볼 때마다 이름을 바꿨어요. 왜냐하면 미국 이름으로 써야 심사위원들이 빨리 알아보는 면이 있기 때문이죠. 한국 이름으로 신중현이라고 하면 복잡하니까 그 사람들이 잘 모르잖아요. 그래서 미국인들이 많이 쓰는 이름을 사용했죠.
Q:  애드 훠의 음반을 발매한 엘케엘(LKL) 레코드사라는 곳은 어떤 데인가요? 방금 말한 그 음반이나 이동기 악단 등의 음반을 발매한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음반을 내자고 제안하거나 기획한 사람이 있었을 것 같은데 누구였는지요?
-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에 전부 트로트 풍의 음반들을 내던 때인데 몇몇 레코드사는 조금 다른 음반을 내려고 했죠. 그 중 하나인 엘케엘 레코드사 사장이 음악을 좋아했고, 내가 미8군에 있을 때 나를 찾아와서 음반 하나 만들자고 해서 만든 거죠.
Q:  그때는 취입한 곳은 어디였고 취입하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셨나요?
- 그건 장충동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이에요. 남산 올라가는 중턱에 있는 곳입니다. 거기 응접실에 차려놓고, 이쪽 한 귀퉁이에 녹음기 갖다 놓고, "자, 합니다!" 쫙 누르고 딱 하면은 그냥 하는 거죠. 삥 둘러서서 마이크 하나 놓고 드럼 세트 차려서 거기다 대고 들입다 하는 거죠. 열두 곡 정도 (녹음)하면 아침부터 저녁이면 끝나요. 동시에 하니까. 더빙도 없고 마이크 하나 딱 놓고. 빨간색 군대용 녹음기가 있는데, 녹음기가 딱 요만해요. 릴 모노이고, 마이크 하나밖에 못 꼽는 것이었죠. 
Q:  베이스 드럼같은 소리는 잘 들리질 않는 것 같습니다
- (드럼의) 세팅은 다 되어 있는데 그냥 (소리가) 날라서 마이크 하나로만 들어가는 거죠, 그러니까 실제 연주하는 그 소리로 하는 거죠. 그러니 잘 안 들리고... 그리고 제일 큰 문제가 뭐냐면 한번도 안 틀려야 된다는 점이었죠. 그 많은 곡을....
Q:  연주를 틀린 사람은 혼났겠네요.(웃음)
- 아, 그때는 연주하다 틀리면 그건 음악인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열 몇 곡을 한번도 안 틀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야돼요. 그래야 실력자로 인정을 받았어요. 
Q:  한 곡 녹음이 끝난 다음 스톱 버튼을 누르지도 않고 다음 곡을 연주했다는 말씀인가요?
- 그건 아니고 한 곡하고 쉬었다고 또 한 곡하고...이런 식이었죠. 
Q:  그게 녹음 방식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언제쯤입니까? 또 모노에서 스테레오로 바뀐 건 또 언제쯤...
- 히키 신 이름으로 나온 음반을 모노로 녹음한 게 58년도이고... 애드 훠(The Add 4)이름으로 "빗속의 여인" 등을  녹음한 게 1964년인데, 그때만 해도 스테레오는 스테레오였죠. 마이크가 두 개가 되었고 더빙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애드 훠는 더빙하지 않고 그냥 동시에 했고, 그 후 1967년도 "봄비"를 레코딩할 때 쯤 해서는 더빙도 할 수 있었어요.
Q:  이정화 음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마지막 트랙 같은 경우 더빙을 한 것 같은 느낌을 주던데요.
- 네. 이정화... 그때가 1967년도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때 더빙이란 걸 잘 몰라 가지고 그냥 동시에 다 했어요. 마이크 두 개 그냥 놓고 했어요. 이정화 음반도 더빙 없고, 김정미 것도 더빙 없어요. 그냥 동시에 했던 거야. 김추자와 펄 시스터즈의 음반도 한번에 간 거구요.  
Q:  그렇다면 기타 소리가 두 개가 나오는데 그건 다른 분이 동시에 연주하신 건가요?
- 아, 그것만 더빙을 하죠. 그러니까 노래가 있을 때는 다 같이 한번 연주해서 녹음하고 나중에 몇 개만  더빙을 하는 식이었죠. 그건 아마 김정미 때부터, 한 1971년인가 1972년인가 때부터 했어요. 
Q:  그게 흔히 말하는 멀티트랙 레코딩이 시작되었다는 말씀이시죠?
- 네. 그때 4트랙이 나왔어요. 1970년도에 4트랙이 나왔고, 그러면서 급속도로.. 16트랙, 24트랙 발전하는 게 거의 6개월 단위로 발전해 온 거죠. 기계들이 새로 착착 들어오니까.
Q:  더 맨 시절인 것 같은데, 길게 녹음하신 롱 버전들, 예를 들어 윤용균 음반 뒷면에 있는 "거짓말이야", 지연 음반 뒷 면의 "안개 속에 여인"같은 것들을 모아서 재발매할 계획은 없나요? 
- 난 사실 하고 싶은 게 딱 그런 건데. 지금도 재발매를 내가 직접 하는 것도 아니고, 동업자가 하나 있어서 그 양반이 하자고 그래서 하는 건데. 그 양반이 또 내 생각하곤 좀 다르니까. 사실 그런 걸 하고 싶어했던
Q:  더 맨 시절의 음반들을 보면 앞면은 가수들의 짧은 노래들이구요, 뒷면은 밴드의 긴 연주가 들어 있습니다. 특별한 의도나 기획이 있었던 것인지요?
- 그게 왜 그러냐면 나는 독집 외에는 안 내주거든요. 뭐 중간에 누가 끼어 들고, 이런 식의 옴니버스 음반같은 건 안 하고 독집만 내 줬는데, 한 가수의 독집을 내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잖아요. 그러니까 앞면만 가수의 노래를 취입을 해주는 거예요. 뒷면은 내가 애드립을 하는 것으로 채우는 거죠. 그러니까 독집을 내려니까 앞의 네다섯 곡은 해볼 수가 있는데 시간상, 즉 뒷면까지 그 가수의 노래로 채우려면 너무 시간이 걸리니까, 뒤에다 내가 한 거 하나 삽입해서 내다보니까 그런 것들이 많이 있어요.
Q:  그럼 장현과 더 맨이란 건, '장현과 더 맨'이 밴드 이름인가요, 아니면 장현 앞면, 뒷면 더 맨인가요?
- 장현이 자기 이름을 더 맨의 앞에 넣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더 맨은 다 반주를 맡아서 다 해 줬어요, 나는 음반 제목이 그렇게 나온지 몰랐고 요즘에 와서 알았어요. 원래는 그냥 더 맨이었죠. 물론 장현이 노래 부른 게 앞면에 있으니까 자기가 (앞에다) 쓴 거라면 나도 할말이 없는데.. 묘하네요. 장현과 더 맨이라...허허.
Q:  엽전들 경우에는 기타 소리가 2개 이상 들립니다. 그건 오버더빙하신 건가요?
- 네. 더빙을 했죠. 근데 그걸 굉장히 후회합니다. 더빙을 하지 않았어야 작품이 되는 건데, 그때는 주위에서 자꾸 더빙할 수 있다고, 스테레오로 해야 한다고... 그래서 하기는 했는데 내가 그때 착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땐 잘 몰랐으니까. 
Q:  원래 엽전들 1집의 초반 경우는 조금만 나오고 발매가 안 된 것으로 압니다만...
- 그렇죠 초반은 그런 게(더빙이) 없어요. 그냥 한번에 녹음했는데 그 다음부터 레코드사에서 자꾸 상품화를 해 달라고 그러니까... 내가 맨 처음에 한 것들은 상품화가 아니거든요. 음악적인 면으로 취입을 했는데. 사람들이 듣고는... (초반은) "미인"이 첫 번째 트랙도 아니었고. 5분 이상으로 길었어요. 그걸 듣더니 짧게 해서 넣어 달라고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건데... 그건 뭐 상업성으로 치우친 거죠.

▲ 미8군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신중현
신중현 라이브(1): 미 8군 무대와 1960년대
Q:  엽전들 이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여쭤 보고 지금은 애드 훠 시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애드 훠의 활동은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들었는데요.
- 예. 그게 왜냐하면 그때 처음 그런 풍을 했으니까 그런 것이었죠. 미8군에 있다가 일반(무대)에 한번 진출을 하자, 이래 가지고 큰맘을 먹고 연습을 해서, 녹음을 해 가지고 나왔는데, 기대에 어긋났죠. 그때는 일반적으로 (전부) 트로트 풍이었으니까... 
Q:  '블루즈 테트'라는 밴드의 멤버도 비슷하셨나요?
- 아뇨. 그건 달라요. 그 후에 다시 그 애드 훠 깨져 가지고 다시 8군에 들어가서 했던 밴드죠. 8군에서 나올 때는 큰소리치고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려니까...(좌중 웃음)
Q:  애드 훠가 주로 섰던 무대는 동두천 쪽이라고 들었습니다
- 그게 아니고... 동두천은 그때 애드 훠가 잘 안 되는 바람에 동두천에 갔는데 곧바로 미 8군 들어가기 힘들고, 8군에 다시 들어가려니까 창피하고 그러더라고... (웃음) 그래서 동두천에 가서 '야메 쇼'라고, 비밀로 하는 거죠. 허가도 없이, 직접 미 8군 애들하고 얘길 해 가지고, 싸게... 왜냐면 그렇지 않으면 공연을 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동두천에 있었죠.
Q:  당시 미 8군 쇼 기획사들이 많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화양, 대영, 유니버설 같은... 어디에 소속되어서 활동하신 것이죠?
- 대영은 나중에 생겼고, 화양과 유니버설 두 군데가 제일 컸죠. 나는 화양에 있었고, 화양은 내가 애드 훠를 만든 1964년 이전이 전성기였어요. 내가 애드 훠를 만들어서 나온 이유는 미 8군(무대)가 사양길에 들어섰기 때문인 면도 있었어요. 그 후에는 그룹 사운드 형태로 많이 생겼죠. 근데 그때 미 8군(무대)은 그 전에 비해서는 빈약한 거죠. 그 전에는 한 단체가 20-30명씩 빅 쇼로 운영했으니까. 
미8군 쇼 무대 시절 신중현은 손꼽히는 기타리스트였다. AFKN에 출연하기도 했고, 미국 레코드사로부터 음반취입 제의를 받기도 했다(기획사가 레코드사에서 보낸 편지를 전달해주지 않아 음반 취입은 무산되었다). 사진은 영자 신문(국내 발행으로 보인다)에 기사화된 것.
Q:  선생님은 미 8군 무대에서는 4-5인조의 기타 밴드가 아니라 빅 밴드에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애드 훠 같은 4-5인조로 미8군 무대에 서신 적은 없으셨던 것인지요? 물론 앞에서 야메쇼를 하셨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걸 제외한다면...
- 우리는 플로어 쇼라고 그래서 쇼단 멤버가 한 30명 돼요. 밴드가 한 열 몇 명이 되기 때문에 풀 멤버죠, 브라스도 있고 다 있었죠. 왜냐하면 쇼 반주도 해대고, 댄싱 뮤직도 해대니까 대형이죠. 그때 우리 할 때가 쇼단 규모가 가장 컸고, 무용수부터 코미디하는 사람까지 전부 데리고 다녔어요. 그리고  애드 훠를 하면서도 사실은 미 8군 오디션을 나중에 다시 봤어요. 근데 그때는 패키지 쇼로 오디션을 보았죠, 한 5-6명 정도로 축소를 해서. 그래야 가격이 싸니까.
Q:  그럼, 블루즈 테트로 활동하시고 펄 시스터즈로 대박 터지는, 그 사이 기간 동안에는 동두천에 잠시 계시다가 다시 미 8군 무대로 들어가셨다는 말씀이군요.
- 그렇죠. 동두천은 당분간 있었고...한 3개월 있었고. 곧바로 미 8군 오디션을 다시 봤죠.
Q:  미 8군 무대는 백인 장교 클럽, 하사관 클럽, 사병 클럽이 따로 있었고 사병 클럽도 흑인 중심인 데가 있었고 백인 중심인 데도 있었다고 하는데 주로 어떤 클럽에서 연주하셨는지요?
- 그때는 다 가죠. 왜냐면 미8군은 2가지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하우스 밴드라 그래가지고 한 장소에 전속으로 밴드하는 그런 형태가 있고, 하나는 아까 말한 플로어 쇼라고 그래서 그건 전국에 돌아다니는 쇼 단체죠. 그러니까 그건 클럽마다 다 다른데, 그건 클럽 성격에 맞춰서 (연예기획사에서) 레퍼토리를 바꿔 줘요.
Q:  앞의 질문은 '신중현의 음악'이 록 음악인데 소울 같은 흑인 음악의 영향도 강해서 물어본 것입니다만...
- 아, 그 소울이란 말은... 백인들은 로큰롤을 하지만 흑인들은 리듬앤블루스를 한다고 그러죠 소울이란 음악은 없고. 소울이란 말은 '음악 자체가 멋있다', '음악 자체가 영혼이 있다'할 때 나오는 말이에요.  그래서 '야 이건 소울 뮤직이다', '너는 좀 소울이 있다' '너는 좀 필(feel)이 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죠. 그러니 백인 음악도 소울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영적으로 무언가 느끼면 미국인들은 '소울...' 이런 식으로 반응을 해요. 그런 음악이 존재하던 시대라서... 우리는 장교 클럽이면 장교들에 맞는 스탠더드 음악을 해 주고, 사병이면 로큰롤을 많이 해주고, 그리고 서전트 클럽, ACO라 그러는데 거기 가면 상사들이기 때문에 촌놈들이 많아요. 그래서 컨트리, 카우보이 음악같은 것도 연주했죠.
Q:  이것저것 다 하셨단 말씀이시네요. 그렇게 이것저것 하면서 신중현 특유의 연주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의아합니다.
- 그건 이것저것 하면서도 각각의 맛을 내주면서 사실은 내 음악을 하는 거죠. 미국인들은 그렇게 하는 걸 좋아하지, 그대로 이미테이션(모방)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요. 개성을 가지고 있어야 오디션도 점수가 많이 나오죠. 미국인들은 음악적 재능이 있는가 없는가를 많이 따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우리나라는 모방, 그러니까 그대로 흉내내는 걸 좋아하는데, 미국 사람들은 그런 걸 싫어하더군요.

▲ 1974년의 신중현
신중현 라이브(2): 1970년대와 '일반 무대'
Q:  그 뒤 펄 씨스터즈나 김추자 같은, 선생님이 말씀하신 '내 우먼들'을 키우게 된 이유가 밴드로 하시다가 잘 안되어서 그렇게 하신 건지요? 그러니까 애드 훠처럼 밴드로 음악을 하는 게 당시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별 호응이 별로 없으니까, 작곡과 연주는 직접 하고 가수는 외부에서 키운 것인가요?
- 아니, 그건 아니고 나는 계속 그룹을 갖고 있었어요. 펄 (시스터즈)은 유니버설에 있었고 난 화양에 있었는데, 신인으로 등장할 때 나한테 사사를 받았어요. 노래 공부를 하겠다고 날 찾아와서, 내가 레퍼토리와 창법 등 여러 가지 기초적인 공부들을 많이 도와주었죠. 그러다가 1968년도에 내가 베트남에 군예대로 가서 8군 무대에 서려고 계약을 해서 헤어지게 되니까 기념으로 음반을 만들게 된 것이죠. 그때 기념으로 내어 준 게 "님아"인데 그게 터지는(히트하는) 바람에 킹박이 잡아서 베트남에는 안 갔죠. '가면 안 된다' 자꾸 그러고 또 한국에서 히트하니까 굳이 내가 뭐 월남까지 갈 이유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해약을 해버리고 여기 남아 있겠다고 마음 먹으면서 계속 작곡 생활을 한 거죠. 그룹은 그룹대로 그룹 음악을 하면서. 가수들에게는 계속 곡을 주는 일을 병행한 것이죠. 
Q:  그렇지만 일반인은 신중현을 그룹의 리더라기보다는 작곡가로 많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룹을 직접 한 것은 의외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씀드리기 죄송한 말씀인데 직접 노래까지 부르실 필요가 있는가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나는 미 8군 무대부터 그룹을 하면서 노래도 계속 했었어요.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부터 시작해서 로큰롤을 노래했죠, 미 8군의 그룹 활동을 그렇게 했었고. 일반 무대에서는 노래를 안 하고 가수만 내보냈지. 그리고 엽전들 때 이제 내가 처음 노래를 한 거죠. 물론 애드 훠 때 중간에 몇 곡을 했지만 본격적으로 노래를 하겠다는 건 엽전들 스타일의 곡이었죠. 엽전들 때의 한국적인 록은 가수(를 위한) 곡이 아니거든요. 이제 그룹 곡이기 때문에. 내가 천상 해야 될 형편이었고, 그래서 한 거죠. 
Q:  애드 훠 때는 정규 보컬이 서정길 씨였던 것 같은데, 고정적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엽전들 이전까지 덩키스나 퀘션스의 경우에는 보컬이 정규 멤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객원 보컬 개념이었는지요?
- 네. 애드 훠 때는 많이 바뀌었어요. 그때는 마음이 예민했었잖아요. 예민하다 보니까 조금 이상하다 그러면 바꿔치우고 이런 일이 흔했죠.(좌중 웃음). 덩키스나 퀘션스 때는 그런 것도 있었지만...가수들이 노래가 히트하고 스타가 되면 나오지도 않아요. 연습도 공연도 펑크내고, 뭐 하고 있나 보면 다른 데 가서 돈 받고 노래하고 있고... 가수 위주로 곡을 만들고, 반주도 가수 위주로 만들어서 연습하고 녹음했는데 가수가 없어져 버리면 남은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가수들이 그런 걸 잘 몰라요. 그래서 결국 최초로 3인조로 엽전들을 만든 것이죠. '다 필요 없어, 베이스하고 드럼만 뒤에 있으면 된다', 이러면서 한 거죠.
Q:  '명동에 사무실이 있었을 때 직원이 20명이 있었고 돈을 쓸어 담았다'는 말도 나오던데요.
- 돈을 뭐 쓸어 담아, 술로 다 먹어치웠는데...(좌중 웃음)
Q:  쓸어 담은 다음에 술값으로 다 갔군요.
- 그러니까 장안에서 내 술 안 얻어 먹으면 PD도, 기자도, 음악인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엄청 먹었어요. 하루에 다섯 가지 종류를 쉴 새없이 먹었으니까.
Q:  선생님 밴드가 애드 훠는 4인조, 덩키스와 퀘션스는 5인조, 더 맨은 6인조, 엽전들은 3인조 식으로 발전해 왔는데, 이런 변화에 어떤 의도가 들어 있는 건가요?
- 대개 음악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하다 보면은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게 되고. 멤버도... 멤버 때문에 또 음악이 발전 안 할 수가 있어요. 연습들도 안 하고 그러면, 그땐 가차없이 해산해버리고 다시 만들고 그랬죠. 
Q:  그 중에서 본인 생각에 가장 싸이키델릭했던 밴드로는 어떤 그룹을 꼽으시나요?
- 더 맨 시절이거든요. 그때 그러한 컬러로 만들었던 멤버인데. 그게 인제 1972년도, 1973년도... 더 맨의 멤버들은 좀 발전한 멤버들이죠('발전한'이라는 표현은 '연주력이 뛰어나고 연습도 잘 하는'이라는 뜻으로 들린다). 덩키스 때도 "In-A-Kadda_Da-Vida" 같은 것을 시민회관에서 자주 연주하곤 했죠. 맨날 하고 그랬죠. (필자 주: "In-A-Kadda_Da-Vida"는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곡 "In-A-Gadda_Da-Vida"를 말한다. 당시 그룹 사운드들이 반드시 커버했던 싸이키델릭 록 넘버이다.)
사진은 1970년 공연 모습. 시민회관 리싸이틀에서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Q:  그때 제일 기억나는 공연 같은 게 어떤 것이었나요?
- 지금 세종문화회관 자리가 그때 시민회관이었거든요, 거기밖에 설  자리가 없었어요. 제일 큰 무대가. 거기서 주로 많이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이트 클럽 음악도 많이 하고.. 로얄 호텔이라든가, 타워 호텔...(필자 주: 당시 손꼽히던 고고 클럽을 말하는 것이다.). 닐바나같은 곳은 나는 안 했지만 당시 그쪽에도 밴드가 많이 나왔었죠. 
Q:  1969년 10월 19일 일간스포츠를 보니까요. '신중현 리싸이틀 / 해괴한 쇼 / 환각 조명 속에 가수들의 광란이 / 곡마다 간주에 무용 / 객석을 계속 긴장시켜 / 의상은 판탈롱 일색' 이런 기사가 나오는데요. 10월 17일부터 20일까지 시민회관에서 하셨다고. 관중들은 많이 왔나요? 그 공연을 담은 자료 같은 건 남아 있는 게 없나요? 영상자료 같은 거.
- 그때 시민회관에서 많이 했어요. 자료는 뭐 [In-A-Kadda_Da-Vida] 같은 건 판도 나와있죠.(필자 주: 이 답변은 시점이 혼동되어 있다. 질문은 1969년 덩키스 시절 시민회관 '신중현 리사이틀'을 말하고 있는데, 신중현은 퀘션스 시절인 1970년 시민회관 공연 실황을 담은 [In-A-Kadda-Da-Vida]를 말하고 있다.)
환각 조명이란 스트로브 조명이라는 팍팍팍팍 튀는 조명이고 우리가 제일 처음 시도한 거예요.
Q:  1960년대 말 그리고 1970년대 초반에 쭉 밴드들 계속 하실 때 그때 선생님 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궁금하거든요.
- 난 팬이 없었어요(좌중 웃음). 내 음악을 좋아하는 팬이 몇 사람 있었는데, 나는 뭐 내가 좋아서 음악을 한 것이지... 
Q:  이런 말은 좀 여쭤보기 곤란하지만 1970년대까지 주 수입원은 무대 수입이었습니까? 또 연주인들의 수입은 일반인에 비하면 나았던 편인가요?
- 그렇죠. 1970년대는 무대수입이었고, 일반인에 비하면 나았던 것 같네요. 매일 연주하니까 그런 것이고, 조금 유명해지면, 주가가 올라가니까... 오비스 캐빈 같은 데서도 하고, 고고 클럽, 나이트 클럽 같은 데. 나이트 클럽은 좀 늦게 하고. 하여튼 초저녁에 종로부터 시작해서 명동으로 들렸다가 무교동까지 갔죠. 엽전들 때는 매일 세 군데를 돌면서 일했죠. 그런데 한 번은 매니저가 6개월치 출연료를 매니저가 중간에서 받아먹고 튄 적이 있어요. 우리는 6개월 동안 공짜로 일 하면서 그걸 다 물어주느라 고생했죠. 하여간 음악인들이 참 순진하니까 매니저들이 착취하는 게 있어요. 우리가 인기가 있으니까 계약은 되죠. 그러면 미리 6개월치 돈이 나오는데 그걸 받아먹고 도망 가서 자기는 회사 차리고 있어요. 내가 이름은 얘기하지 않지만 그 친구는 참 머리가 좋은 사람이예요. 겉으로는 유명하니까 돈 많이 버는 줄 알았는데 세 명이서 쫄쫄 굶었죠. 다 떼어 먹히고, 허허허.
Q:  선생님, 신문기사 이런 거 보면은 1970년 초반에 명동에 코스모스 살롱에 고고클럽을 개업하셨다고 그런 기사가 나있는 걸 봤습니다. 혹시 이름만 빌려주신 건지요?
- 그런 거 안 했는데. 오비스 캐빈에서 연주한 것을 그렇게 생각을 한 거죠. 내가 그런 거 차릴 돈 있었으면 이러고 있겠어요, 지금? 이름 빌려준 것도 없었어요. 
Q:  당시 그룹 사운드는 현충일 빼고 매일 연주했다고 그러던데 만일 그렇다면 음반 취입은 언제 하셨던 건가요?
- 예, 맞아요. 음악하는 사람 노는 날이 현충일 밖에 없었어요. 음반 취입은 낮에 해야 했죠. 우린 밤에 일하고 낮에는 녹음실에 가있죠.
Q:  요즘은 음악하는 젊은 친구들이 설 무대가 그때보다도 적은 것 같습니다.
- 그렇죠. 지금은 없는 편이에요. 그때는 술자리가 그런 데 밖에 없었고...

신중현 사상, 그리고 히피 문화
인터뷰 도중 한 컷.
Q:  선생님 음악 관련해서 많이 얘기하는 게 지미 헨드릭스이지 않습니까. 그 얘기 좀 해주시죠. 선생님이 라이벌로 생각하셨던 건가요?
- 라이벌이 될 수 없죠. 지미 헨드릭스는 정말 천재죠, 음악의 천재. 나는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고, 뭐 상대도 안 되는 거고... 단, 그 사람은 그 사람 음악이고, 난 내 음악이지. 그 사람은 서양적으로, 미국적으로 록 음악을 펼친 사람이고, 난 한국적으로 펼친 사람이니까. 그러니 라이벌보다는 내가 인정을 하는 것이죠. 그 사람의 음악성이랄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기타 주법이랄까 이런 것들을. 최초로 싸이키델릭 기타를 친 사람이 지미 헨드릭스니까 기타리스트들한테 영향을 많이 줬죠. 나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어떠한 영향을 주었냐면... 우리 20세기가 낳은 전체적인 문화, 그러니까 우리가 현재 조명을 한다든가, 사진을 찍는다든가, 디지털을 한다든가, 뮤직 컴퓨터라든가, 이펙트라든가, 이게 다 지미 헨드릭스에서 나온 거예요. 그 사람이 없었으면 그러한 게 나올 수가 없어요. 근데 우린 그걸 잘 모르지. 왜냐면 지미 헨드릭스는 드럭, 그러니까 약물, 그러니까 LSD나 퍼플 헤이즈(Purple Haze)나 이런 약을 먹으면서 클레어된 정상세계를 벗어난 다른 세계에 들어갔던 거죠. 그 세계에서 그림을 그려서 그 세계에서 느꼈던 것을 다시 클레어로 옮겨서 펼친 사람이 지미 헨드릭스죠. 그런 면에서 우리가 내추럴적인 면을 지속한다면 클래식 음악, 베토벤같은 음악이 그대로 발전하는 클레어적인 음악이 하나 존재할 것이고, 이와는 다른 파격적인 음악이 지미 헨드릭스 때문에 탄생한 거예요, 싸이키델릭이라는 것은 록이란 음악을 발전시켰던 것이죠. 20세기 전 클래식 음악이란 어쿠스틱 음악, 그러니까 전기가 없는 시대의 음악이잖아요. 바이올린이고 뭐고 다 내추럴한 악기인데, 록 음악에서 전기로 과학적인 문명을 같이 받아들여서 발전시키면서 음악을 만들었던 것이죠. 이게 20세기의 그룹들의 음악이죠. 그것이 록(로큰롤)이란 시초를 만들어내면서 발전을 하다가, 1967년, 1968년 요 때에 지미 헨드릭스가 싸이키델릭 록으로 반전 데모를 하면서 동양을 캐기 시작했어요.
마리화나같은 것은 인디언에서 나온 건데, 인디언 영화 보면 인디언들이 삥 둘러앉아서 대마초를 한 대씩 피우잖아요? 그걸 마리화나라 그러는데, 그걸 한 대씩 돌리잖아요. 그게 해피 스모크인데 그게 뭐냐면 추장들이 평화를 유지하는 그런 해프닝을 갖는 동안에 나오는 것이죠. 그걸 받아들인 게 미국의 히피에요. 히피족이 베트남 전쟁에서 젊은이들이 많이 죽다 보니까 반전 데모를 시작하면서 평화를 부르짖었던 거죠. 'Love & Peace'를 부르짖으면서 손을 이렇게 들었던 거죠(손을 들어 V자를 만들어 보인다). 이건 어디서 나온 거냐면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에서 나온 건데, 2차 대전 때 처칠이 손가락으로 빅토리 사인을 사용했어요. 세계 평화, 빅토리를 해야 평화가 온다고 처칠이 손가락으로 빅토리 사인을 했는데 히피들이 그걸 이용해서 로고로 썼어요. 'Love & Peace다', 'Peace를 하기 위해선 우리도 싸워야 된다'는 식의 사상이 들어오면서 그것이 록 문화에 접목되고, 이런 록 문화를 만들어낸 사람이 지미 헨드릭스예요. 그 사람의 기타 주법이나 이런 것들이 전부 이런 클레어를 떠난 세계를, 즉, 인간의 정신세계는 그만한 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죠. 물론 약물의 힘을 빌었지만, 인간 체내에는 그만한 정신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죠. 그 사람이 만들어낸 정신세계가 바로 싸이키델릭 음악입니다.
Q:  선생님은 그런 것을 어떻게 접하셨나요. 음악도 음악이지만, 히피 사상이나 히피들의 문화 같은 것들을 주로 어떻게, 어떤 분들을 통해서 접하셨는지. 그런 얘기들을 어떻게 접하셨는지.
- 그건 내가 우리 초창기 음악을 계속 발전시켜오면서 히피들하고 내가 생활하면서 알게 된 거죠. 내가 록 음악을 하다 보니까. 시민회관, 지금 사진이 없어서 좀 그렇지만, (거기서 공연할 때) 앞에는 전부 히피들이 앉아 있었어요. 무대에 걸터앉아 있고. 조명도 싸이키델릭 조명을 쓰고.... 히피들의 사상이 나쁜 게 아니에요, 정말. 'Love & Peace', 평화를 부르짖는 반전 데모를 하는 친구들이라 굉장히 온순하고 모두 젠틀하고 멋있었어요. 띠 두르고 머리 여기까지 내려오고 인디안 무늬로 된 옷을 입고. 청바지 찢는 것도 그 사람들이 그때 다 한 거에요. 지금 사람들 청바지 찢고 다니지만은, 그때 청바지 찢은 게 히피들이예요. 그런 문화를 벌써 옛날에 다 했던 거예요.
여기 지금 카메라도 찍고 있지만 카메라의 오목 렌즈의 그 휘는 것이나, 거리감을 주는 것이나, 뒤집어엎는 것이나, 이게 다 그때 싸이키델릭 문화에서 나온 겁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모든 문화를 발전시켰고, 그래서 헤어스타일부터 의상까지 다 바뀐 거예요. 그 문화가 없었으면 지금은 그대로 클레어적인 문화를 계속 고수할 거예요. 지금은 발전해서 20세기의 문화가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은, 그 문화가 어디서 나왔냐면 바로 음악 문화, 록 문화에서 나온 거죠. 사람들은 이런 걸 모른다고... 왜냐하면 그 과정을 모르기 때문에. 근데 알고 해야 돼요, 알고...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문화수준을 모른다고. 정치가부터 문화계에 있는 사람부터 마인드가 없고, 머리에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이 뭘 하니까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정말 창피해요, 창피해. 외국 나가보면 창피해요. 외국 사람들은 벌써 옛날에 저 수준에 가있는데 우린 이제 이 밑바닥에서 어쩌고 저쩌고 헐뜯기나 하고, 알지도 못하는 게 아는 척하고. 이런 것들은 정말 없어져야 돼요.
Q:  지미 헨드릭스의 연주 스타일과 비해서 신중현 스타일은 또 다른 것 같습니다. 기타 이펙트도 많이 쓰지 않고 안 쓴다는 점도
- 그럼, 물론이죠. 그니까 지미 헨드릭스는 지미 헨드릭스 스타일이고, 나는 내 스타일이 있죠. 이펙트 문제는... 그때는 이펙트가 거의 없었어요. 잘 나오지도 않고 나와도 쓸만한 게 없었어요. 이정화 음반 마지막 트랙에 나오는 것처럼 와와 페달 정도나 사용했죠. 

그룹 사운드, 포크, 그리고 '록 뽕'
Q:  같이 활동하셨던 음악인들 중에서, 음악적 동료나 후배로 아끼는 분이 어떤 분이 있을까요. 선생님 밴드 말구요.
- 뭐, 다 아끼죠. 우리 음악인들은 그때는 다 한 식구 같았어요.. 그룹 사운드 협회를 내가 또 만들었고, 같이 협조도 많이 했구. 우리 조기축구회도 있었으니까.
Q:  그룹 사운드 협회 분실에 대해 조금 더 여쭤 보겠습니다. 이 단체는 1972년도에 만들어졌고, 신중현님은 2대 회장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뒤에는 유명무실해진 듯합니다.
- 지금은 그냥 연예협회 소속이 되어 있죠. 지금 누가 하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협회라는 게 음악인들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협회라는 게 음악인을 돕겠다는 게 아니라 음악인으로부터 무언가 뜯어가는 면이 많아요. 
Q:  국내 음악인 중에서는 어떤 분을..
- 국내요? 국내는 창작성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어요. 음악이라는 것은 창작성이 없으면 그건 음악이 아니에요. 그냥 흉내나 내서 잘 치고 잘 하고... 뭐 이거는 옛날에, 저 미국애들이 더 잘 해요.
신중현은 1972년 포크 가수 양희은, 서유석에게 곡을 주어 독집 음반을 만들었다. 그것은 양희은과 서유석의 디스코그래피에서 매우 독특한 음반이 되었다. 사진은 서유석의 음반을 녹음하던 중 스튜디오에서 찍은 것.
Q:  1972년 경에는 양희은, 서유석 등 포크 가수들하고도 작업하셨잖아요. 양희은 씨나 서유석 씨 이런 분들. 그때 선생님이 보신 포크송이나 통기타 문화 이런 것들에 대해 얘기해주시다면.
- 1970년도 전후로 나왔던 포크 가수들의 자세는 굉장히 겸손했어요. 음악을 할 수 있는 자세를 구비하고 있다고 할까. 그러니깐 생각부터 시작해서 음악에 대한 지식이랄까 이런 것이 아주 정도를 밟고 있던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정말 아껴야 될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하여튼 그 당시에 통기타를 들고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 음악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냥 뭐 남이 기타 치니까 자기도 치고, 남이 노래부르니까 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고, 자기 음악성을 들고 나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높이 평가하고 싶어요.
Q:  일반적으로 통기타 계열과 그룹 사운드 계열은 좀 다르게 보는 것 같습니다만...
- 그게 잘못이죠. 그건 참 잘못이에요. 그때 당시에 내가 뮤지컬 영화 [푸른 사과]라든지 같은 음반에서 그런 사람들을 다 출연시켰어요. 그리고 공연할 때도 다 같이 하고. 그러니까 그런 사실들을 당시 잘 인식을 못했는지,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서 그런 건지... 정말 분위기가 기가 막혔어요. 콘서트를 자주 하고, 남이섬 같은 데서도 콘서트하고, 많은 활동을 같이 했죠. 영화부터 시작해서.
Q:  대마초로 음악 활동을 못하시게 된 다음 그룹 사운드 출신들 일부에서는 트로트로 전향한 경우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 그때가 어떤 말이 나왔냐면. '뽕 록'이라고 그랬어요. 아니 '록 뽕'이라고 그러던데. 난 그 소리 듣고 그냥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우리가 죽어버리니까 뭐 남은 후배들은 살판 났죠. 난 그때 정말 죽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어요.

▲ 1988년 자신의 작업실 '우드스탁' 에서